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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타 나오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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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즈타 나오마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을 지낸 인물이다. 아이치현 출신으로,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서 근무하다가 조선총독부 재무국에서 사무관, 사계과장, 재무과장을 역임했다. 1937년 재무국장에 취임하여 1945년까지 재직했으며, 광복 직후 일본인 예금자들의 예금 인출 사태에 대응하여 조선은행권을 대량 발행했으나, 이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여 비판을 받았다. 그는 가쿠슈인 상무이사, 동화협회 발족 멤버로 활동했으며, 취미는 독서, 문예, 타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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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타 나오마사
기본 정보
이름미즈타 나오마사
한자 표기水田 直昌
로마자 표기Mizuta Naomasa
출생 및 사망
출생1893년
사망1947년
직업
직업검사, 변호사
경력
경력대구 복심 법원 검사
대전 지방 법원 검사
조선 총독부 사법관 연수소 강사
평양 복심 법원 검사
변호사 개업
제국 비밀 탐정사 고문
소속
소속변호사 (개업 후)
기타
관련 인물제국 비밀 탐정사

2. 생애

아이치현 출신으로, 미즈타 나오아쓰(水田直温일본어)의 맏아들이다. 1921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뒤, 일본 대장성 관료로 근무하였다. 후쿠오카오사카시 미나미(南) 세무서장 등을 역임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로 옮겨와 재무국에서 근무하기 시작했으며, 1937년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에 취임하여[2] 1945년 9월 광복 시점까지 재직했다. 재임 중에는 조선사 편수회 위원을 겸임하기도 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경성에서 일본인 예금 인출 사태가 발생하자 대량의 조선은행권을 추가 발행하는 조치를 단행했다[3]. 이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까지 한국 경제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4].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가 1947년 가쿠슈인 상무이사를 지냈으며, 옛 식민지 조선 관련 인사들이 모인 동화협회(훗날의 중앙일한협회) 발족에 참여했다.[6]

2. 1. 초기 생애 및 일본 내 활동

아이치현 아이치군 나루미정에서 미즈타 나오아쓰(水田直温일본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1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졸업 후 대장성에 들어가 이재국에서 근무하며 국제 금융 및 동아시아 경제 사정 조사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1922년 7월 사세관(司税官)에 임명되었고, 이후 후쿠오카 세무서장과 오사카시 미나미(南) 세무서장을 역임했다.

2. 2. 조선총독부 관료 시절

아이치현 출신으로, 미즈타 나오아쓰(水田直温일본어)의 맏아들이다. 1921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대장성 이재국(理財局)에서 국제 금융, 동아시아 경제 조사 등의 업무를 맡았으며, 주무국(主務局)으로 옮겨 후쿠오카시오사카시 미나미(南) 세무서장을 지냈다.

1925년 1월, 조선총독부 재무국 사무관으로 임명되어 조선으로 건너왔다. 이재과 세무관을 거쳐 1928년 4월에는 사계과장(司計課長)으로 예산 및 결산 업무를 담당하였다. 1937년 10월 30일에는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에 취임하였으며[2], 조선사 편수회 위원을 겸임하기도 했다. 그는 1945년 9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재무국장으로 재직하였다.

2. 2. 1. 해방 직후 활동과 논란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패전 직후, 경성에 있던 일본 자본의 민간 은행에서는 일본인 예금자들이 예금을 대량으로 인출하는 예금 인출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대응하여 당시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이었던 미즈타 나오마사는 1945년 8월 16일부터 말일까지 조선 서적 주식회사의 인쇄 공장에서 천엔짜리 고액 지폐 70억 분, 가까사와 인쇄 주식회사에서 백엔짜리 지폐 21억 분의 조선은행권을 추가로 발행했다. 또한 같은 달 17일에는 "조선 내 통장을 일본에 가져가면 매월 500JPY 한도 내에서 예금을 인출할 수 있으며, 일본에 본점이 있는 은행의 송금 수표는 일본에서도 유효하다"는 담화를 발표하여 금융 모라토리엄 발생에 대비하고자 했다[3].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통화량의 급격한 증가를 초래했다. 1945년 8월 15일 당시 조선은행권의 발행 잔액은 49.699999999999996억이었으나, 불과 한 달여 뒤인 9월 28일에는 86.5억으로 급증했다. 이는 해방 직후 혼란한 경제 상황 속에서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으며, 이후 미군정 시기까지 한국 경제에 큰 부담을 안기는 결과를 낳았다[4].

2. 3. 일본 귀국 후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인 1947년에는 가쿠슈인의 상무이사가 되었다. 또한 옛 식민지 조선 관련 인물들이 모여 만든 동화협회(나중에 중앙일한협회로 변경됨)의 발족 멤버로 참여하였다.[6]

3. 취미

취미는 독서, 문예, 타구이다.

참조

[1] 웹사이트 水田 直昌 http://webcatplus.ni[...] 2023-08-01
[2] 웹사이트 官報 1937年11月01日 https://dl.ndl.go.jp[...] 2023-08-01
[3] 서적 p.180-181 2023
[4] 서적 p.182 2023
[5] 웹사이트 Webcat Plus 저자 정보 http://webcatplus.ni[...]
[6] 웹사이트 가쿠슈인 대학 동양문화연구소 - 우방문고에 대하여 http://www.gakushu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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